이 땅의 하나됨을 위하여
김종인
그대여, 우리 언제 대한민국을 이토록 뜨겁게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그대여, 우리 언제 아리랑을 목놓아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그대여, 우리 언제 애국가를 목청껏 노래한 적이 있었던가.
신성한 태극기를 얼굴에 그려 넣고, 이마에 두르고, 어깨에 걸치고,
앞치마처럼 질끈, 허리에 동여매고, 시청 앞 광장을 가로질러
미친 듯이 광화문 네거리를 달려본 적이 있었던가.
코뼈가 부러지고, 발목이 접질리고, 온 몸에 멍이 들고, 눈두덩이 찢어져 붉은 피 잔디밭에 뚝뚝 흘리며, 마침내 이뤄낸 승리이기에
오, 이제는 세계가 두렵지 않아라.
우리 모두 붉은 바다가 되자고 외친 10만의 힘이, 붉은 강물이 되어 폴란드전에서 50만이 되고, 미국전에서 150만이 되고, 포르투갈전에서 300만이 되고, 이탈리아전에서 500만이 되어, 운동장에서 흘러 넘치고 넘쳐, 시청 앞 광장으로, 광화문 네거리로, 여의도 고수부지로, 부산에서, 대구에서, 인천에서, 대전에서, 마침내 빛고을 광주 도청 앞에서, 금남로에서, 온통 붉은 물결이 노한 파도처럼 덮쳐갈 때,
폴란드도, 미국도, 포르투갈도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도, 드디어 무적함대 스페인마저 물리치고 꿈에 그리던 세계 4강에 올랐을 때,
월드컵 출전 48년만의 첫승도 아니고, 목메어 부르던 16강도 아니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히딩크의 말에도 반신반의하던 그 8강도 아니고, 홍명보의 오른발이 직각으로 꺾이며 피버노바가 철렁! 육각형 그물 안에서 퍼득거릴 때,
아아, 비로소 대표팀의 주장 홍명보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질주하다가, 힘껏 하늘로 솟아올라, 히딩크식 어퍼컷을 허공으로 날리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 때,
아아, 이게 웬일이여 !
꿈에도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세계 4강의 기적 앞에서,
폴란드를 이기고 월드컵 첫승에 목놓아 울었던
신문선도, 허정무도, 차범근도, 송재익 아나운서도,
아아, 이게 무슨 일이여 ! 꿈인가 생시인가 !
그만 말문이 막히고, 눈앞이 아득하고,
그저 이게 웬일이여 ! 목이 잠겨 말도 못할 때,
아이고 좋아라! 월드컵이 사람잡네!
이경규가 목을 놓을 때,
세상은 온통 시뻘건 파도로 변해 솟구쳐 올랐다.
서울 시청 앞에서, 광화문에서 전국 400여 곳의 광장과 운동장과
공원과 네거리에서 안방과 발코니와 전신주와 아파트에서,
붉은 악마와 치우신왕과 도깨비가 하늘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일제히, 환호작약 !
미쳐서 펄쩍펄쩍 뛰는 사람들이 온통 빨갱이가 되어 거리로,
거리로 몰려 나왔다.
아무나 붙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래, 우리 두리 아들아, 장하다!
그래, 코뼈가 부러진 데는 괜찮냐?
그래, 애 썼다 애 썼어!
여보, 당신을 믿었어요! 당신이 최고예요!
지성아, 내 아들아 ! 엉엉 !
여보게, 명보 잘 했어 ! 잘 했어 !
스탠드에서, 운동장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아무나 붙잡고,
어깨를 걸치고,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며 울었다.
지난 유월의 하늘은 뜨거웠다. 불볕 더위도 그들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용광로 같은 광장으로, 아스팔트 위로,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물결은 사방으로 흘러 넘치기만 했다.
이제 붉은 옷쯤이야 두렵지 않았다.
이제 대-한민국의 다섯 박자에 신명이 났다.
3.1운동과 8.15와, 4.19와 유월 항쟁이 이러했을까.
그래 언제 우리 대한민국을 뜨겁게 불러 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 우리 언제 애국가를 목청껏 불러 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 우리 언제 아리랑을 목놓아 불러 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 언제 함께 부둥켜안고 실컷 울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제 우리, 세계가 두렵지 않아라.
이제 숨죽이며 살아온 서러움도 날려 버려라.
이제 벤치만 지키던 푸대접도 날려 버려라.
이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서럽지 않아라.
이제 붉은 옷도, 붉은 머리띠도 두렵지 않아라.
이제 두 팔 쭉쭉 뻗어 올리며 연호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아라
이제 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것도 부끄럽지 않아라.
그리하여, 우리들의 월드컵은 이제 막을 내리겠지만,
그대들의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다.
세상의 온갖 악이며, 부정이며 부패, 무질서와 이기까지도 걷어차 버리고,
열정과 절제와 순수한 초심으로 돌아가,
오직 자유와 평화와 화해의 바다로 나아가라.
강철체력의 스피드로, 멈추지 않는 기관차처럼,
세계 곳곳을 누비는 도깨비처럼, 중원부터 제압하는 벌떼처럼 압박하라.
그리하여 이런 감격이면, 이런 환희면, 이런 정신력이면, 이런 투지면, 이런 기쁨이면, 무엇인들 못하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마침내, 분단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통일 세상으로 승화하리.
북을 울려라. 꽹가리를 두들겨라. 한바탕 질벅한 잔치를 벌리자.
이 땅의 하나 됨을 위하여!
이 땅의 하나 됨을 위하여!
꿈을 비는 마음으로,
새로이 꿈을 꾸어야 할 때,
히딩크의 꿈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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