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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년 동안 전남일보에 '오디오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던 글들을 계절별로 재구성하여 묶어보았습니다.
 
 
남진 팬, 서태지 팬 바닷가의 추억
모두 승자가 되는 노래 질투
사랑과 우정 사이 안녕
쉽지 않은 <사랑고백> 노래방 (1)
그저 바라볼 수만... 동요 <가고픈 나라>
사랑이 떠나면... 노래방 (2)
 
 
 

남진 팬, 서태지 팬

문화는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꾸고 지킬 때 그 사람들 곁에 존재하게 된다. 생
각만 있고 지키려는 노력이 따르지 못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문화는 점차 소멸되고 적극적으로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것만 세력을 넓혀가게 된다.

노래만 해도 그렇다. 요즈음 많이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들을 만한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30대 중반을 분들의 얘기다. TV 쇼프로그램을 보면서 정서적으로 자신들과 너무 동떨어진 느낌을 받고 그로 인해서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 주부들을 위한 노래프로그램에서 요즘 유행하는 랩을 한번쯤 가르치려 해도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열심히 해보려 하지만 마음만 김건모일 뿐 뜻대로 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흐르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는 아픔을 본다.

그러면 이들이 부르고 싶어하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는 왜 점점 줄어드는 것일까?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변화인가. 아니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상업성을 배제할 수 없는 가요의 경우에 적극적인 수요가 적극적 공급을 창출하게 된다. 가수가 꼬박꼬박 1년에 음반 한 장씩을 발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적게는 3천만-4천만원씩 많게는 5천만원 이상이 들어가는 제작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작비와 부대경비를 회수하기 위해서는 10만장 정도가 팔려야 본전이 될까 말까다. 말이 쉬워 10만장이지 참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수치다.

그런데 서태지, 김건모의 경우에 1백만장 또는 2백만장을 훌쩍 넘어 버린다. 바로 서태지와 김건모를 좋아하는 팬들의 극성스러울 정도의 구매욕구가 가요계의 천하통일을 가져온 것이다. 반대로 듣기는 좋아하지만 음반사는 것에는 소극적인 팬들을 가진 가수는 자연 설 자리가 좁아지게 되고 그들의 노래는 뜸하게 된다.

최진희의 노래를 더 듣고 싶은가. 남진의 노래를 더 부르고 싶은가. 오늘 <그 여자가 가는 곳은>과 <빈잔>을 한 장씩 사면 될 것 같은데...

 
 
 
 

모두 승자가 되는 노래

로마가 제국의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를 보면 출정식이나 개선할 때 나팔소리 울려퍼지는 장면이 반드시 나온다. 당시 실제로 그러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음악이 없는 출정식 개선식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 아닐까? 요

즘 군대에서도 군가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하겠다.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겠지만 목청껏 쉰소리로 군가를 부르노라면 기운이 생기곤 한다. 또 문선대라는 특수부대가 따로 있어 이들은 총 대신 기타와 마이크를 들고 각 단위부대를 찾아다니며 병사들을 위로한다. 위의 경우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용맹한 군대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문제는 적도 같은 방법을 통해서 사기가 충천해 있든 것이다. 이 두 군대가 싸우게 되면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전쟁이 있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민족들이 그들의 고향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강력한 여리고성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엿새 동안 여리고성을 그냥 돌게 하고 칠일째 되던 날 성을 일곱 번 돌며 나팔을 불게 한다. 그러자 여리고성 벽이 무너져 내리고 손쉽게 여리고를 함락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에라도 승자와 패자는 존재한다.

요즘 한반도의 정세가 묘하다. 한 궤도 위에서 마주 향해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때에 사랑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노래, 남과 북이 반만년의 역사를 공유해온 단일민족임을 일깨워주는 노래, 피 한방울 없이 양쪽 다 승자가 되는 노래 한 곡을 부르지 못하는 필자의 능력 부족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야 말로 노벨평화상의 임자가 아닐까?
노래 한 곡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바란다면 너무 감성적인 것인가.

 
 
 
 

사랑과 우정사이

"톡톡"
대학도서관에서 한 남학생이 앞에 있는 여학생의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러나 여학생은 반응이 없다. 다시 한 번 두드려 보지만 여전히 무반응이다. 세 번째 소리에 여학생은 벌레 보는 듯한 시선을 남기고 책을 싸들고 자리를 뜬다.

그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남학생은 "톡톡" 소리 대신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을 바라보던 싸늘한 여학생의 시선이 빙그레 웃음으로 바뀌었다. 십 여년 전 국민학교 시절 봄소풍 때 담임선생님과 반장 부반장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사진 속에 있었다. 어렸을 적 반장과 부반장이었고 짝이었던 두 사람의 대학에서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재수를 해 이제 신입생이었던 반장은 1년 선배가 된 부반장에게서 처음 하는 대학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반장과 부반장의 만남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부반장은 반장을 사랑하게 되었다. 반장은 그냥 친구처럼 생각했던 부반장의 그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하기엔 뭔가 부족한 것 같고 우정이라 하기엔 뭔가 더 있는 것 같은 애매한 감정. 이 어색한 감정은 2년 동안 계속되었고 반장은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부반장은 군인이 된 반장에게 편지를 썼다.

'... 어깨 위엔 낙엽이 세월처럼 쌓여도 / 그대 한 번 눈길은 나의 가슴에 남아 / 외로운 밤 함께 지새리니 / 따스한 그대 눈길로 한 번만 돌아보아 준다면 / 나 항상 여기 선 채로 기다릴테요...' 이 편지는 <나목>이란 노래의 가사가 되었다.

부반장은 졸업하고 몇 년 후엔 결혼했다. 반장 아닌 다른 사람과.

'...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던 너를 / 이젠 나의 눈물과 바꿔야 하나 / 숨겨온 너의 진심을 알게 됐으니 / 사랑 보다 먼 우정 보다 가까운 / 어색한 사이가 싫어서 나는 떠나리... ' 피노키오가 부른 <사랑과 우정사이>라는 노래다.

반장은 요즘 이 노래를 자주 부른다.

 
 
 
 

쉽지 않은 '사랑고백'

"사랑해요"라고 얘기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맨 처음 사랑을 고백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또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린 후에 오늘만은 고백해야지 하고 집을 나서지만 막상 그 사람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다가 결국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오던 기억, 한 번쯤은 다 있으리라.

말하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랑해"라고 말하고 난 후에 상대방의 반응인 것이다. 벼르고 별러 고백을 했건만 마음속의 연인으로부터 '죄송해요. 그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군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등의 대답이 나왔을 때 그 비참한 고통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송창식은 처음에 하는 고백의 어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말을 해도 좋을까 / 사랑하고 있다고 / 마음 한 번 먹는데 하루 이틀 사흘 / 돌아서서 말할까 마주서서 말할까 / 이런 저런 생각에 일주일 이주일 / ... 땀만 흘리며 우물쭈물 바보 같으니 / ... 눈치만 살피다가 지나온 한평생"

그러나 용기 있는 사람은 박력있게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또 시작이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계속 확인해야 하는 괴로운 절차가 남아 있는 것이다. 정말 저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마음을 샅샅이 살피고 싶어진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나요 / ...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 나의 사랑을 믿나요 /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 ...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 ...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맨처음 고백이 그렇게 힘들었기에 첫 키스는 그만큼 황홀하고, 사랑이 한 번씩 확인되고 상대방의 마음을 알게 될 때마다 이 세상은 온통 내 것이 되는가 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랴!

 
 
 
 

그저 바라볼 수만...

"나무는 좀이 슬어 구멍 뚫리면 바람이라도 통하지 저렇게 꽉 막힌 사람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장 보편적인 한국 남성과 결혼생활을 하는 어느 부인의 말이다.
목석 같은 사람이란 말이 있지만 그래도 나무는 나은 편인가 보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표현을 쉽게 하지 않는 것이 남자다움이라 믿는 보편적인 한국남성들.

애터지는 것은 여자다.
나 죽은 다음에 가슴을 열어보면 숯덩이가 돼있을 거라는 인고의 세월을 지낸 아내들의 외침을 이해할 것도 같다.

남자들도 할 말은 있다.
가족의 부양을 책임져야 할 남성들의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엄청난 좌절과 무기력함을 인정하게끔 강요하는 현실이 있다. 안락해야 할 가정에서 상대적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더 느껴야 한다면 남성들의 설 자리는 어디여야 하는가? 연애시절 천사 같던 아내를 흐르는 세월과 자식들에게 빼앗겨 버리고 몸 하나 누이기 편치 못한 가정. 남자도 괴롭다.

아내와 남편들의 이런 상반된 입장이 부딪치게 되면 오히려 별관계 없는 사람들의 다툼 때보다 더 많은 상처를 내게 된다. 가장 이해해주고 사랑해야 할 부부나 연인사이가 가장 가학적인 관계가 된다면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 그리워 떠오르면 가슴만 아픈 사람 / ..." 유익종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어느 꿈 많았던 젊은 날 손님처럼 찾아 왔던 사람이 어느 날 온통 나의 전부가 되고 주인이 돼버렸던 그 사람. 그 사람을 위해서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 노래 한 곡 어떨까?

"... 어둔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너의 빛 되리 /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 나는 너의 친구야..." 윤복희의 <여러분>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정말 힘들었지만 당신이란 울타리가 있어 든든하고 행복했어요."
노래와 함께 이런 편지 한통 쯤 서로에게 보냈으면 좋겠다.

 
 
 
 

사랑이 떠나면...

필자가 자주 가는 찻집이 있는데 어렸을 적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맷돌, 우마차바퀴, 물레의 북, 학독, 여물을 담던 구시동이 소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주인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은 이것들이 상당한 가격을 주고도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되었다고 한다. 없으면 더 귀한 것이 되나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도 어떤 이의 든 자리 보다 나간 자리가 훨씬 크다고 한다.
'오래된 연인들'이 헤어지면 더욱 그렇다. 전화가 오면 이 핑계 저 핑계로 그 사람을 따돌리게 되고 습관처럼 주말에 한번쯤 만나야 하고... 그러던 어느날 상대방이 훌쩍 떠나버리면 빈자리의 허전함으로 눈물 흘리게 된다.

'이제 그리워 할 수 없어요 / 나의 사랑을 믿을 수 없어요 / 떠나 가버린 그대의 빈자리 / 다시 채워질 수 없기에 / .. 이제와 후회 할 수 없지만 / 차라리 울어나 볼 것을 / 세월이 갈수록 안타까워지는 / 아쉬움이 싫어요' 이상우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세상이 온통 어두워지고 절망으로 불면의 밤을 세우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목놓아 울게 된다.

'어딘가에 있는 줄 알면서도 / 만날 수 없는 현실이 싫어 /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 / 이젠 소용이 없는데 / .. 한번쯤 만나고 싶다는 생각 들겠지 / 깊이 사랑하니까 / 하지만 혼자 남는 법을 알 때까지 / 다시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나현희의 <다시 사랑하지 않을 거야>

망각이라는 묘약은 이 처절한 아픔을 조금씩 치료해주고 흐르는 세월은 혼자 남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된다.

'... 난 지금껏 어둔 밤을 헤맸어요 / 여태 지워야 할 기억이 너무 많았어요 / 오늘 난 식어버린 마음 구석에 / 사랑의 불씨를 당겼어요 / ... 이제 다시 사랑할 수 있어요 / 이제 진정 웃을 수 있어요...' 해바라기의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이것을 인생이라고들 한다.

영원한 사랑은 없는 것일까?

 
 
 
 

바닷가의 추억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그 사람 / ...'

햇빛이 뜨거워지면서 방송을 통해 어김없이 듣게 되는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을 들으며 살인적인 가뭄과 함께 찾아 온 여름을 실감하게 된다.

바다에 관한 노래를 부른 이유로 여름이면 필자를 찾는 바다가 적지 않다. 한 번은 강릉방송국의 초청으로 설악을 뒤로 한 어떤 바닷가에서 촬영을 한 적이 있다. 4분2초의 길이를 가진 <바위섬> 한 곡을 촬영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썼다. 3시간이 넘는 강행군 끝에서야 담당 PD는 OK 사인을 하고 철수 지시를 했다. 장비를 다 챙기고 방송국으로 돌아가려는데 군용지프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더니 담당 PD와 필자에게 동행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따라간 곳이 군사정보기관이었고 그 당시 잘나가던 필자와 그 PD는 군인들의 욕지거리에 대꾸 한 번 제대로 ahtg고 고생해서 만든 그 필름을 빼앗기고 말았다. 군 작전 지역이고 촬영금지구역이라는 이유였다.

신안군 소재의 도초라는 섬이 있다. 그 섬에서는 여러분 피서에 권해드리고 싶은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는데 시목리라고 한다. 이 섬의 청년들이 의욕적으로 그 해수욕장을 선전하기 위해서 노래자랑을 개최하고 필자를 초대가수 겸 심사위원으로 초청했다. 도초라는 섬이 생긴 이후로 가수가 오기는 필자가 처음이라고 했다.
공연을 마치고 그 섬의 유지인 양조장을 하시는 분 댁에 묵게 되었는데, 그 어른께서 필자를 위해 손수 싱싱한 홍어와 막걸리를 준비해 놓고서 잠들기 전 필자를 옥상으로 부르셨는데, 술을 못 마시고 홍어 냄새를 극히 싫어하는 필자에게는 그림의 떡일 밖에... 주인 내외분만 대취하고 말았다.

자기 마을 사람이 1등을 해야 한다고 수시로 압력을 넣던 각 마을의 유지분들, 심사위원장을 하시던 면장님이 내밀던 음량 30점, 박자 30점, 음질 30점, 반응 10점이라는 비전문가의 아주 전문적인 심사기준에 빙그레 속으로 웃던 기억. 시간이 허락한다면 올 여름엔 시목리 해수욕장을 꼭 다시 찾고 싶다.

 
 
 
 

질투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과거에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고백을 듣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남자는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또 사랑하는 남자가 어젯밤 늦게까지 다른 여자와 같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속이 편한 여자도 없을 것이다.

이 때 생기는 감정이 '질투'라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이성이 마비되고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상대방을 의심하게 되고, 조그만 불신의 감정이 그렇게 견고할 것만 같던 서로의 사랑에 흠집을 내고 무뎌지게 하는 건 순간이다. 사실 정도만 심하지 않다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질투'를 받는 것은 은근히 재미도 있고 오히려 가슴 뿌듯함까지 느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문제는 질투를 하는 쪽이 받는 쪽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모르게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따지고 해명을 요구하자니 상대방이 나를 속좁고 유치한 사람으로 볼까 걱정이 되고, 또 그러는 내 자신이 왠지 초라한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질투'라는 감정은 그것을 하는 사람이 자신 없을 때 생기는 것이다. 순간순간 사랑이 확인되고 자신감이 넘쳐있다면 아마도 그런 감정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매순간 사랑이 확인되며 매사에 자신감이 넘쳐만 있을 것인가.
지나친 질투는 어리석고 그것은 죽음의 묘지와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질투하고 있을 때 상대방은 그 사람의 감정을 잘 다스려줘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질투는 눈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결국 '질투'를 물리칠 수 있는 건 사랑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한 것 아니겠는가? 흔히들 사랑을 하면 목숨을 걸겠다고 한다. 그 목숨을 건 사랑이면 만사 OK 아니겠는가?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 내가 지금 여기 눈 앞에 서 있는데 /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마 / 웃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마 /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아 / 그저 사랑의 눈빛이 필요할 뿐야 / ... 언젠가 너는 내게 말할 거야 / 사랑한다고"

 
 
 
 

안녕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은 많지만 그중에 더욱 그러한 것이 있다면 바로 결혼이 아닌가 싶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주장이 있을 것이고(물론 이런 것이 무시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형제 간의 우애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막상 당사자인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그리 많지만은 않은 것 같다.

웬만큼의 확신이 있지 않는 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이 사랑하면 그만이지' 하며, 주변여건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를 두고서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렇게 도매금으로 비겁하다고 몰아칠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사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당사자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70년대를 콧수염과 함께 풍미했던 이 아무개라는 가수가 있다. 작사, 작곡에도 아주 재능이 있었던 이 가수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보내야 하는 서러운 감정을 노래로 얘기했는데 바로 <안녕> 이라는 노래다.
결혼을 약속했던 두 사람이 헤어지기로 하고 마지막 밤을 호텔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그녀가 잠든 새벽에 가만히 빠져 나와 호텔문을 나서며 부른 노래다.

"너무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며 / 그대 잠든 얼굴 바라보다가 / 그대 이마에 입맟춤하고 / 나지막히 속삭였네 안녕..."
어저면 여인은 사랑하는 그이의 마지막 입맞춤을 알면서도 차마 눈을 뜨지 못했을지 모른다.

"문밖, 문밖으로 나서니 싸늘한 새벽바람 / 코트깃을 올리고 휘파람 부니 / 이슬인지 눈물인지 내 눈가에 적시네 / 다시 한 번 나지막히 안녕..."

시인 손동연은 고난을 극복하며 흘리는 인간의 눈물을 삭막한 이세상에서 신이 발견한 오아시스라 했다. 휘파람을 불면서 흘리는 남자의 눈물, 눈을 뜨지도 못하고 소리없이 흘리는 여인의 눈물, 이 또한 아름다운 오아시스가 아니겠는가?

이 노래는 여러 가수가 불렀다. 주인공 이 아무개, 조영남, 김태화, 최성수, 이선희 등이 각자의 감정으로 한번씩 노래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김태화의 <안녕>이 가장 감정전달에 충실한 듯싶다.

웬만하면 자식들의 결정을 믿고 존중해주시면 더 좋겠고...

 
 
 
 

노래방 (1)

대학시절 동아리모임이나 과모임, 동창모임 등에 가보면 으레껏 술과 노래가 있었다. 변변치 않은 안주에 막걸리 들이키며 젓가락으로 식탁을 두들기며 목이 터져라 돌아가며 노래 한 곡씩 부르고서야 그 자리를 파하던 그 시절...
그러던 것이 기계문명의 발달로 노래방이라는 것이 생겨 회식의 마지막 장소로 노래방, 단란주점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 이런 시설들이 생겼을 때 왜색문화의 침투라는 차원에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점 보다는 좋은 쪽으로 생각들이 기우는 듯 싶다. 일본사람들도 노래부르기 좋아한다지만 글쎄 우리나라 사람들만 하랴 싶다. 가히 전 국민의 가수화라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요즘 가수들 웬만큼 노력하지 않고서는 비웃음 사기 꼭 알맞다. 모두 다 가수다. 그러다 보니 요즘 노래 부르는 자리에서 뒤로 빼는 사람 구경하기도 어렵다. 시키면 기다렸다는 듯이 마이크를 들고 열창을 한다. 가끔 이런 자리를 갖는 경우가 있는데 노래하는 것이 직업인 필자의 경우에 놀이까지 노래가 되니 오히려 피곤할 때가 많다.

사회자의 소개라는 것이 대개 이런 식이다.
"지금까지 여러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는데 이번엔 <진짜 가수>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와" 박수와 함성소리. 여간 고약한게 아니다.
가수 아닌 사람들이야 밑져야 본전이지만 가수는 잘해야 본전이다. 그래도 가수인데 대충은 잘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박수도 많이 쳐준다. 그런데 필자 아닌 다른 사람들 노래할 적에 보면 무슨 인민재판처럼 누구 지명해서 박수 함성과 함께 마이크를 쥐어주고는 전주시작과 동시에 앞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바쁘다. 신기한 것은 노래끝난 걸 어떻게 아는지 박수를 열심히 치는 것이다.

부르는 건 좋아하지만 들어주는 데는 철저하게 인색하다. 부르기 좋아하는 사람보다 들어주는 사람이 더 좋은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닐까?

 
 
 
 

동요 <가고픈 나라>

며칠 전에 모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동요가 무엇인지 조사하고 있다했다. 다행히 평소에 잘 부르는 <바닷가에서>라는 동요를 즉시 대답할 수 있었다. '다행히'라고 표현한 이유는 갑자기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 어쩌면 "나 이 동요 좋아합니다"라고 바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분이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그들만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아이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동요이다.

"언제나 내가 가고픈 나라는 / 일년 사시 아름다운 꽃피는 나라 / 나비가 훨훨 춤을 추고... / 과자로 만든 집 속에서 / 언제까지 들어도 재미만 나는 / 옛날 간날 이야기 꿈속의 나라."

필자가 어렸을 적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가고픈 나라>라는 동요인데 온가족이 돌아가며 부르곤 했다. 지금도 필자가 이런 나라를 꿈꾸고 있다 하면 정신차리라고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항상 아름다운 꽃이 피고 나비가 춤을 추는, 항상 과자를 먹을 수 있고 재미잇는 이야기가 넘치는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타락한 어른들이 만든 어지러운 세상이 적어도 아이들의 세계로 침투하지 못하게 해야 할텐데. 주변을 보면서 이미 위험수위를 넘고 있음을 볼 때마다 가슴 답답할 때가 많다. 사우나 휴게실 TV에서 무시무시한 폭력장면과 아주 야한 장면들이 쉴새없이 방영이 되고 있지만 숨죽이고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이런걸 봐서는 안되는 거라고 하거나 아이들을 위해 채널을 바꾸는 경우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아이들을 성폭행하는 것도 어른이다. 돈이 된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아이들의 호주머니를 훔치는 (얄팍한 상술로) 도둑놈도 어른이다.

이런 어른들 재판정에 세워 어떻게 벌을 주었으면 좋겠는데...
재판장이 이런 판결을 내렸으면 좋겠다.
"오늘부터 부모들은 매일 한 곡씩 아이들과 동요를 불러야 한다." 땅! 땅! 땅!

 
 
 
 

노래방 (2)

"가수의 소질이 있습니다"
노래방에서 80점대의 점수를 받으면 화면에 적혀지는 자막이다. 가수가 노랠했는데 기계가 감히 소질이 있다 없다 하다니... 기계를 힘주어 째려보지만 이녀석은 다음 노래의 전주를 열심히 연주해댄다.

그런데 평소에 노래에 관한 한 필자가 마음껏 무시했던 친구가 노랠했는데 팡파르 울리고 박수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90점 이상의 점수와 함께 "훌륭한 가숩니다"라는 자막이 펼쳐지는 것 아닌가? 친구는 그동안 노래로 당했던 수모를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고 몽땅 갚는다.
"가수라고 별 것 업구먼 허허허..."

가끔 노래방에서 노래점수를 가지고 내기를 하는 경우를 본다. 물론 높은 점수를 얻었다고 해서 노래를 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내기가 된다면 지기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한 노래방 기계의 점수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박자나 음량이다. 노래를 멋드러지게 부르려 하면 점수는 90점 대가 나오기 힘들다. 정확한 박자가 생명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경쾌하고 꾸밈음이 별로 없는 단순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내기에 이기는 지름길이다. 특히 마디마디마다 첫박자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김세환 <그 어느날 오후> 류의 노래들이 비교적 실력에 비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박자만 정확하다면 소리가 적어도 상당히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다음엔 음량(소리의 크기)인데 이것의 기본은 key조절(자신의 음역에 맞추는 것)이다. 여성이 남자가수의 노래를 부를 때는 반드시 여성의 key로 고쳐서 불러야 한다. 남성의 경우는 그 반대고 노래 중간에 너무 높거나 낮아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key 조절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두 가지만 해결된다면 노래방 내기에선 백전백승이다.
그러나 필자가 책임은 못진다. 개개인의 능력차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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