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루사' 가 만들어 놓은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는 여수입니다.
잘가라 지역감정' 49일 공연의 6번째 지역인 이곳 여수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시민 한 분이 제공해주신 숙소로 돌아 왔습니다.
'루사' 가 지난 후 여름에서 가을로 변해 가는 별빛 밝은 저녁입니다.
평소에 나는 지역감정 따위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 열기가 전국을 달구던 지난 6월 어느날 지하철 안에서의 작은 사건 하나가 내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한 뿌리깊은 지역감정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타고있는 지하철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고약한 인상의 청년들이 들어섰습니다.
머리는 짧고 드러난 어깨에는 '차카게 살자' 수준의 조잡한 문신이 새겨진, 낮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고 옆 사람을 위 아래로 훑는 모양새가 무례하기 짝이 없더군요
그들을 보면서 저들의 입에서 내 고향 사투리가 나올까봐 가슴을 졸였습니다.
다행(?) 스럽게도 그들의 입에서는 다른 지역의 사투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안도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들의 무례함에 분노하지 못하고 내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의 사람이 그러하다는 것으로 안도하고 거기에 더해 고소하다고 까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비열한 지역감정이 나의 마음속에도 자리하고 있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지하철에서 일어난 에피소드가 49일간의 '잘가라 지역감정' 공연을 결심하게 하였습니다.
고민해 보았습니다. 결심하나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무리 몰아 내려해도, 두둘겨 패도 사라지지 않는 지역감정이라는 놈을, 스스로는 절대로 죽지 않는 이 괴물들과 대항해서 싸울 무기가 나에게 있는가?
있었습니다.
바로 노래와 시였습니다.
물론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이었구요.
그동안 만났던 노래친구들과 시인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모두가 저의 생각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래서 50여 팀의 노래친구들과 이 땅의 문인 80여명이 지역감정이라는 괴물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리고 전국 49개 지역을 돌며 즐거운 49재를 지내기로 뜻을 모으게 된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격정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몇몇 못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친구들이 마련해준 200만원의 쌈짓돈을 가지고
우리는 첫 공연지 제주로 향했습니다.
제주 시민들의 뜨거운 격려를 받으며 출발한 우리는 바다건너 목포에 도착 나주, 광주, 순천을 거쳐 오늘 여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일 섬진강 다리를 건너 진주로 향합니다.
보이지 않는 철망을 걷어 내면서 말이지요.
섬진강을 경계로 남해고속도로 동쪽에 자리한 진주, 사천, 통영, 마산, 진해, 밀양, 김해, 부산 등에서는 이제 몇 일간 지역감정이라는 괴물이 죽어가는 신음으로 요란하겠지요.
그것을 생가하면 이 밤에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이 괴물아 기다려라, 너를 장사지낼 이 땅의 노래와 시가 간다.
몸은 고단하지만 나의 노래가 필요한 곳에 힘을 보탤 수 있어서 요즘 행복합니다.
200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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